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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마시게 될 작은 병과 먹게 될 작은 케이크에 대하여

이강혁 〈Snakepool : Down the Rabbit Hole〉, Platform Place 629, 2017.11.08. - 11.30

review on event in 2017 at 미공개 원고

거기까지는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그 토끼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앨리스는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이구 맙소사! 아이구 맙소사! 너무 늦겠어!” (나중에 앨리스는 사실 그 장면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토끼가 말을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그 토끼가 정말로 자기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 시계를 꺼내서 쳐다보고, 다시 바쁘게 뛰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앨리스는 벌떡 일어섰다. 아직 한 번도 조끼를 입거나 회중 시계를 갖고 있는 토끼를 본 적이 없었으므로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앨리스는 토끼를 좇아서 들판을 가로질러서 달렸다. 그리고 곧 울타리 아래 뻥 뚫려 있는 커다란 토끼 굴을 보았다.

다음 순간 앨리스는 어떻게 다시 바깥 세상으로 나올지 생각해볼 틈도 없이 곧장 토끼 뒤를 따라 내려갔다.

(「토끼 굴에 떨어지다Down the Rabbit Hole」,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우리는 토끼를 쫓는 앨리스를 쫓아 굴로 뛰어든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끝도 없이 떨어진다. 저 멀리 어렴풋하게 빛이 보인다. 굴의 끝에 도달한 걸까? 잘 모르겠지만 쏟아지는 빛을 뚫고 도달한 그곳에는, 토끼도 그 토끼를 쫓던 앨리스도 없다. 본의 아닌 여정의 끝에는 몇 장의 낯선 사진들이 놓여있다. 그렇게 우리는, 이강혁의 〈Snakepool : Down the Rabbit Hole〉의 사진들과 마주한다.

긴 토끼굴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거의 모든 것들이다. 사물들, 풍경들, 인물들…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물감을 찾아낸다. 사물들은 과도하게 클로즈업되어 있다. 풍경들은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 인물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온전하게 정면을 향하지 않는다. 사물들은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피사체가 된다. 풍경들은 주로 밤의 풍경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둠 속에서 바라본 빛들이 시선을 잡아챈다. 인물들은 때로 분절되어 파편적으로만 드러난다.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그리고 의외로 평범하다고 느낄지도 모를 피사체들 사이에 조심스레 자리하고 있는 이물감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다.

이강혁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스냅Snap의 형태를 취한다. 포착된 대상들이 인지하지 못하게 혹은 인지했더라도 내밀한 지점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내는 스냅이기에, 우리는 밀려드는 불안을 전적으로 피사체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냥 그렇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사물들과 풍경들은 그것들 자체를 내보일 뿐이다. 그나마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쪽은 인물들이 담겨 있는 몇몇 작업일 것이다.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들, 약간은 어색한 손의 위치, 정면을 향하면서도 온전하지 못한 응시는, 불안감을 유추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는 내포된 불안의 근원이라기보다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져오는 다른 종류의 불안에 가까워 보인다. 응시의 주체에서 응시의 대상이 된다는 불안, 그리고 그것이 수많은 이들에게 관음과 전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가져오는 불안일 것이다. 더 나아가, 스냅이라는 형식적인 범주가 주로 취하는 내밀한 장면들의 포착에서 기인하는 정돈되지 않음으로 인한 오해일 수도 있다. 허나 이러한 지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이 이물감은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어쩌면 그것은 토끼나 앨리스가 아닌, 다시 말해 피사체들이 아니라, 토끼굴로 쫓아 들어간 이들의 심연에 위치한 불안감이 아닐까. 이강혁은 퀴어와 인디 씬과 같은 영역들에 대한 작업을 지속해왔다. 흔히 ‘서브컬처Subculture’라고 분류되는 대상들이 그의 주요한 피사체이다. 대상들은 더 이상 무언가의 하위Sub-가 아니다. 그들은 사진의 중심이 된다. 그들은 이강혁에 의해 선택되어, 매력적으로 작동하는 ‘사진적인 것’이다. 이때 관람자의 위치는 역설적이다. 무언가를 관조하고 응시하기 위해서는, 온전하게 그 무언가의 바깥에 자리해야만 한다. 그 사진을 마주한다는 것은 자신이 사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때 관람자는 묻게 된다. 과연 ‘나(관람자)’는 프레임 속에 위치한 그들처럼 ‘사진적’일 수 있는가? 애당초 ‘나(관람자)’는 피사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영원히 가능성의 세계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의문은 ‘사진적’이지 않은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이 정말로 서브컬처의 외부에서 그것을 조망하고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이강혁의 작업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주하게끔 한다. 어쩌면 사진 바깥에 위치한 ‘나’야말로 서브컬처보다 더 서브한, 서브-서브컬처Sub-subculture에 속해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과연 이러한 구분법이 유효하긴 할까? 사실 앞서 언급한 질문들의 전제가 되는 구분 자체가 유효하지 않고, 그저 이강혁에게 포착된 사진적인 것들이 우연하게 비슷한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끝없이 범람하는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별다른 의심 없이 믿어왔던 ‘메인’의 것들의 진위를 묻게끔 하여, 불안하게 만든다.

얼핏 이것은 해체주의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거대 서사의 종말을 외쳤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흔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의 그리고 우리의 불안은, 굳건하다고 믿었던 그 거대한 서사가 붕괴하고 해체됨으로써 마주하게 된 그 거대한 공백에서 오는 불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당초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거대 서사가 존재할까? 그것은 세계를 설명하는, 아주 편리하지만 기만적인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강혁은 이러한 물음들에 직접적으로 답하진 않는다. 전시장의 벽면에는 드랙 퀸과, 금속공예 제품을 판매하는 서울메탈의 상품 홍보와, 꼭지가 떨어진 체리 두 알과, “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짤막한 문장이 적힌 어느 담벼락과, 붉은 색 잼이 뿌려진 먹다 남은 파이와, 아스피린 포장지의 사진이 걸려있다. 어느 것이 다른 것들을 포괄하는 거대한 무언가라고 단정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모든 것들 사이를 관통하는 맥락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저 눈앞에 작은 보이는 것들이 있다.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로(다르게 말하자면, 메인-컬처로) 거슬러올라가려고 해도 끝없이 미끄러질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초평면화된 세계와 조우할 것이다.

앨리스가 토끼굴의 끝에 도달해서 마주한 것은, “날 마셔요”라고 적혀 있는 작은 병과 “날 먹어요”라고 적혀 있는 작은 케이크였다. 앨리스는 그것들을 먹고 작아졌다가 커진다. 그리고 그렇게 이상한 나라에서의 앨리스의 여정이 시작된다. 우리는 토끼굴의 끝에서, 작은 병과 작은 케이크 대신, 이강혁의 〈Snakepool : Down the Rabbit Hole〉을 마주한다. 우리는 그렇게 토끼굴의 끝에서 모험을 시작하는 앨리스처럼, 굳건하다고 여겨졌던 세계가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을 이강혁의 작업들을 통해 마주한다. 마주한 그것들은, 우리를 작아지게 할까 아니면 커지게 할까.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너무 불안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게 무엇이 되었건, 토끼와 앨리스를 쫓아오기 이전과 비교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이 케이크는 먹으면 누구나 커지는 케이크였지만, 앨리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보통 일어나는 일은 따분하고 심심하니까.

그래서 앨리스는 재빨리 케이크를 먹어버렸다.

곧 마시게 될 작은 병과 먹게 될 작은 케이크에 대하여2017-11-11review on eventNow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