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s.
Contact.Personal.Text.
jeondaehan©2026

C와 D 사이에서

investigation/tractatus on concept in 2021 at 서교예술실험센터

Venus X에 의해 2009년 뉴욕에서 처음 시작된 파티 《GHE20G0TH1K》은, 당최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그 제목만큼이나 기이한 음악들의 시발점이었다. 뉴욕의 한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일어난 조금 특이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GHE20G0TH1K》에서 재생된 음악들은 너무 이질적이었다. 《GHE20G0TH1K》는 흔히 “EDMElectronic Dance Music”이라고 불리며 클럽과 페스티벌이라는 상업적 공간을 가득 채우던 전자음악의 주류 장르들뿐만 아니라, 저지 클럽Jersey Club이나 풋워크Footwork, 그라임Grime과 같은 전자음악의 비주류적인 세부 장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필드 레코딩Field Recording과 앰비언트Ambient, 노이즈 음악처럼 대체로 클럽 바깥에서 향유되던 실험적인 유형의 전자음악까지 한 데 섞어 혼란스럽게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GHE20G0TH1K》의 참가자들은 언급했던 장르들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음악을 창작하여 내어놓기까지 했다.

일련의 새로운 음악들은 그렇게 《GHE20G0TH1K》을 중심으로 점차 모이더니 어느 순간 동시대 전자음악 내의 기묘한 한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음악들이 EDM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주류 클럽 음악과 동일한 공간에서 향유되고 재생산되지만 소리적으로는 기존의 클럽 음악과 구분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새로운 음악들에게 ‘포스트-클럽Post-Club’이라는 표찰label을 붙인다. 하지만,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수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으레 ‘클럽 음악 이후의 클럽 음악’이라는 의미의 ‘포스트-클럽’이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아무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과감하게 ‘포스트-클럽’이라는 표찰을 버리고, 새로운 표찰을 제안했다. 이들은 그 음악들의 공통된 소리적 특징에 주목했다. 이 조류에 속하는 음악가들은 주류 클럽 음악이 구사하는 전자음들을 다양한 이펙터를 활용하여 쪼개고 부수고 자르고 비틀어서 왜곡하는데, 그 결과 굉장히 파열적이고 불온한 소리들이 청자에게 들려온다.1 이러한 소리적 특징은 마치 EDM 중심의 기존 클럽 음악의 소리들을 해체하는 듯한 양상을 띠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 조류에 ‘디컨스트럭티드 클럽Deconstructed Club’이라는 표찰을 붙인다.

반면, 영국의 음악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를 비롯하여 동시대 전자 음악에 담론적으로 개입하려는 이들은 이 조류에 ‘콘셉트로니카Conceptronica’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 레이놀즈는 명시적으로 콘셉트로니카를 “어떤 특정한 장르가 아닌, 고해상도의 디지털 추상화부터 베이퍼웨이브Vaporwave와 혼톨로지Hauntology 같은 양식들에 이르는, 힙한 음악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예술적 작동의 양태 – 그리고 청중의 수용”2이라고 정의한다. 더 나아가, 그는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라는 기존의 표찰과 자신이 제안하는 표찰이 차별화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콘셉트로니카’가 “종종 동시대 댄스 음악의 양식들과 왜곡된 거울의 관계”3를 맺는다고 덧붙인다.

우리에게 지각되는 그 음악들은 분명 모두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만 같은데, 이를 호명하기 위한 이름들은 세 개씩이나 존재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어떤 이는 이러한 상황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 단일한 대상을 부르는 이름이 여럿 존재하는 사례가 꽤 많으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개밥바라기’와 ‘샛별’을 떠올려보라.4 관련하여 보다 철학적으로는, 프레게의 퍼즐과 그에 대한 프레게 본인의 해결책이 함축하듯, 동일성 진술의 항들이 서로 다른 인지적 의의나 정보값을 가진다고 답할 수도 있다. 즉, ‘포스트-클럽’과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그리고 ‘콘셉트로니카’는 그저 동일한 지시체reference를 제시하는 서로 다른 방식의 뜻sense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레이놀즈와 같은 비평가/이론가가 주어진 이름들을 계속해서 구분하려는 데는, “사실 세 표찰이 지칭하는 대상들은 서로 다르다.”라거나 “세 표찰들 중 하나의 표찰만이 적절한데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어떤 특별한 직관이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

과감하게도 나는 이 두 입장을 모두 끌어안는 방식으로 이 상황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단적으로 나는 때로는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기도 하는 세 이름들이 동일한 대상에 대한 지각의 서로 다른 양태들을 호명한 표찰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특히, ‘디컨스트럭티드 클럽’과 ‘콘셉트로니카’라는 두 표찰이 각각 ‘동일한 소리 사건을 제시하는 음악에 대한 서로 다른 목적 하에서의 청취 양태mode’를 함축한다고 주장할 것이다.5[5]

그렇다면 ‘디컨스트럭티드 클럽’과 ‘콘셉트로니카’는 동일한 음악에 대해 청자가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진 채로 청취하고 있다고 상정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표찰들이 지칭하는 음악의 대척점에 놓인 EDM이 전제하는 목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DM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클럽이나 페스티벌과 같은 상업적 공간에서 향유되는 유형의 전자 음악을 지칭한다. 그렇기에 EDM은 사람들로 하여금 춤을 추고 싶게끔 만들고 더 나아가 파티의 여흥을 돋우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목적은 청자에게도 암묵적으로 공유되어, EDM의 청자들 또한 청취를 통해 이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 한다. 즉, EDM에는, 서구 음악학에서 소위 “기능 음악Gebrauchsmusik” 혹은 “실용 음악Music for use, Utility Music”이라고 부르는 대상들에 대한 청취에 상정된 기능과 유사하게, 춤과 여흥이라는 구체적이고 세속적인 목적(기능)을 위해 청취하라는 규범이 선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편의상, 이와 같은 구체적인 목적을 선제한 전자 음악이 발생시키는 청취 양태를 ‘목적적 청취’라고 부르기로 해보자.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은 ‘해체된 클럽 음악’이라는 표찰의 축자적 의미에 걸맞게 기존의 전자 음악들이 전제해왔던 목적적 청취를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해체한다. 우선, 이 음악들의 소리적 특징이 목적적 청취를 해체한다.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에 속하는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가들은, EDM을 비롯한 동시대의 주류 전자 음악의 소리들을 부수고 쪼개고 자르고 비틀어 버림으로써 춤과 여흥이라는 목적을 잘게 찢어발긴다. 폐허가 되고 있는 공사장에서 들려올 법한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불규칙한 소리들은, 쾌를 수반하는 춤마저 제시되는 소리 사건에 대한 신체적 반응으로 해체해 버린다.

게다가, 이러한 음악들은 클럽 음악이 주로 생산되고 향유되어 왔던 공간을 (정말로) 해체시킨다는 점에서도 목적적 청취의 해체로 이어진다. 이 음악들은 주로 언더그라운드 나이트클럽에서 제시되지만, 비-클럽 공간들을 통해서도 종종 제시된다. 소위 대안 공간이나 신생 공간이라고 불리는 시각 예술계의 화이트 큐브나 실험 음악이나 즉흥 음악을 위한 블랙 박스로 들어가는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음악가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이들은 라이브 스트리밍을 적극 활용하여 물리적 공간 자체를 철거시켜 버린다. 이러한 비-클럽적 공간에서의 향유는 춤과 여흥이라는 목적이 복무하는 공간적 배경을 해체함으로써 해당 음악의 청취가 상정했던 목적까지도 함께 해체한다. 다시 말해, 클럽이라는 공간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이 음악들이 낳는 청취 양태는 공간을 춤과 여흥으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목적적 청취에는 귀속될 수 없는 일종의 자율성이 귀속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콘셉트로니카’라는 표찰은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 함축하는 목적적 청취를 해체하는 청취 양태와는 정반대로, 다시금 목적적 청취를 세우려는 지향을 내포하는 듯 보인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콘셉트로니카’에 선제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콘셉트로니카’는 EDM을 비롯한 그 이전의 클럽 음악들처럼 특정한 목적(혹은 기능)을 분명 선제하지만, 그것이 선제하는 목적은 과거의 클럽 음악의 그것과 동일하진 않다. 레이놀즈는 ‘콘셉트로니카’의 한 특징을 설명하면서 “콘셉츄얼리즘과 시청각성과 함께, 2010년대의 전자 음악에는 정치적 전회가 발생했다. 예술가들은 눈에 띄게 뚜렷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은 인종, 섹슈얼리티, 혹은 젠더에 기반한 소수자적 정체성에 뿌리를 두곤 한다. 이는 정치적인 것들이 보다 암시적이었던 댄스 음악 문화의 초기 국면과 대조된다.”6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콘셉트로니카 음악가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문화-경제적 배경이나 젠더와 같은 정체성 정치의 국면을 음악에서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또 실제로 그러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콘셉트로니카’라는 표찰을 제안하는 이들은 그 음악의 목적을 현실의 문제에 관한 (비판적) 고찰이나 정체성의 표현 등으로 대체한다. 그렇기에 ‘콘셉트로니카’라는 표찰이 전제하고 있는 청취는 일종의 대안적인 목적적 청취이다. 춤과 여흥이라는 목적 대신, 청자가 소리 사건에 대한 지각과 함께 그 소리들의 함축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옹호하거나 논박하는 식의 비판적 수용까지 하는 것을 청취에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음악가 치노 아모비Chino Amobi는 자신이 “불협화음과 특이한 소리를 사용하여, 청취의 수동적인 경험을 거부하고자 한다. 그리고 청자를 깨우는 능동적인 소리를 사용하려고 한다.”7라고 말한다. 이렇게 청자로 하여금 대안적인 목적적 청취를 하도록 의도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사례는, ‘콘셉트로니카’라는 표찰이 함축하는 청취 양태가 대안적인 목적적 청취임을 예증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요컨대, 나는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라는 표찰이 이전까지의 클럽 음악이 상정했던 목적을 순전히 해체하는 것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삼았을 때(목적적 청취의 해체)의 청취 양태를 함축하고, ‘콘셉트로니카’라는 표찰이 이전까지의 클럽 음악이 상정했던 목적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목적을 설정했을 때(대안적인 목적적 청취)의 청취 양태를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디컨스트럭티드 클럽’과 ‘콘셉트로니카’는, 동일한 소리 사건을 제시하는 음악이라는 하나의 지시체에 대한 서로 다른 목적 하에서의 두 청취 양태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콘셉트로니카’와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은 각각 알파벳 C와 D로 시작한다. 그래서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한편으로 지나치게 사소해 보이는 이 고찰이, 마치 C와 D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작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C와 D 사이에는 다른 알파벳이 존재하지 않는다. C와 D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기에 둘 사이의 간극을 논하는 일은 지극히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C와 D 사이의 간극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간극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 명백히 다른 C와 D를 동일하다고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C와 D의 사이, 혹은 ‘콘셉트로니카’와 ‘디컨스트럭티드 클럽’라는 두 이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결코 사소하지 않다.8

C와 D 사이에서2021-03-23investigation/tractatus on conceptNow here
음악평론가 정구원은 이러한 소리적 특징을 토대로 독자적으로 “철거튠”이라는 표찰을 만든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묘사를 제시한다. “그것은 테크노, 하우스, 덥스텝, 베이스, 인더스트리얼 사이를 넘나들며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던 전자 댄스 음악을 교란하는 이 언더그라운드 클럽 음악에 언제나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리가 깨지고, 드럼 비트가 파열하고, 세츄레이션이 가득 걸린 신시사이저가 쪼개지고, 카랑카랑한 금속성의 사운드가 귀를 찢을 때 – 그것은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철거하는 소리와 직결된다. 단지 그것이 파괴가 아닌 댄스를 위해 복무할 뿐.” 정구원, 「JELLVAKO, “Vision”」, 『웹진 [weiv]』(2018), http://www.weiv.co.kr/archives/23876 (2020년 11월 25일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