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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철학적이면서 철학적인

윤아랑,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리뷰

review on critic in 2022 at 민음사 블로그↗

“무릇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1와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2 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으로부터 출발하자.

이 문장은 흔히 ‘네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는 식의 무례한 언명처럼 오독되곤 하지만, 그보다는 사실 철학적 태도에 관한 소박한 기술에 가깝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정말로 우리의 언어로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무언가이고, 경험적인 존재인 우리는 경험 바깥의 ‘그 무언가’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 여부조차 확신할 수 없기에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말해질 수 있는 것에 관하여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말해질 수 있는 것에 관하여 명료하고 엄밀하게 말하는 일이야말로, 그나마 철학이 수행할 수 있는 과업이자 지향해야 할 태도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무언가 심오하고 엄청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를 ‘철학적’이라고 종종 오인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자꾸 말하려는 시도는 사실 반(反)철학의 태도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윤아랑의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은 반철학적이다. 그는 “무언가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지는 욕구는 그 무언가를 접한 후 시작되는 배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기분을 언어로 해명하려는 욕구”3라고 말한다. 이처럼 윤아랑에게 비평이란 결국 자신이 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을 느끼는지 톺아보고 그 기분은 대체 어떠한지를 기술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윤아랑은 끊임없이 자신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물론 윤아랑의 비평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철학’적이다. 윤아랑은 아카데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하고 폭넓게, 자신의 필요와 의도에 따라 수많은 담론을 취사선택하여 촘촘히 엮어 낸다. 그가 동시대의 영화나 만화, 예능 프로그램 등에 대해 말하기 위해 호명하고 인용하는 여러 철학자들을 상기해 보라. 예컨대, 「(이전) 같지 않으리 – 데이비드 린치론」에서, 윤아랑은 린치의 영화에 관한 지젝의 분석부터 메이야수와 같은 사변적 실재론자의 기획까지의 다양한 철학적 논의를, 린치의 영화 내에서 자동차의 운동과 그 동선에 대해 말하기 위해 과감하게 끌어온다. 게다가, 그 와중에 들뢰즈에 대한 지지를 넌지시 드러내거나, 조너선 크래리와 같은 매체철학자의 논의를 덧붙이기까지 한다. 이렇듯 윤아랑의 비평은 기존의 철학적 논의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다. 심지어 윤아랑 스스로가 자신의 비평을 헤겔의 ‘긍정성’에 부합하는 기획으로 해명하고 있기에, 그가 철학적이지 않다는 평가는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겠다.

윤아랑의 비평이 반철학적이라고 말하는 나의 진단은 그의 비평의 내용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윤아랑의 단언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단언한다. 윤아랑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이미지나 서사나 현상에서 말미암아 정치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데, 분명 그것들은 우리가 쉽사리 검증하거나 증명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윤아랑은 (영화)비평에 관한 일련의 글들(「네임드 유저의 수기」, 「자신을 자신하지 않으면서 자신하기」,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에서 ‘등단’이라는 제도와 그에 대한 비판이라는 가시적인 현상을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등단 비평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비추어 비평을 둘러싼 제도를 유지시키는 정동을 기술하는 동시에 인플루언서라는 또 다른 자신의 정체성에 근거하여 그 제도를 비판하는 이들의 일견 순진한 욕망을 묘사하여, 제도와 그에 대한 비판 사이의 “기괴한 꼬리 물기”4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인 동력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단언한다. 이처럼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인 정치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을 끊임없이 말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나는 윤아랑의 비평을 반철학적이라고 느낀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나는 윤아랑이 결국에는 철학적 비평을 수행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윤아랑은 분명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의 모든 비평들은 결국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더 잘) 말하고자 할 뿐이기 때문이다. 윤아랑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이론이나 담론처럼 사변적인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이나 윤리적인 것과 같이 말해야만 하지만 말할 수는 없는 것도 아닌, ‘실재’다. 예컨대, 등단 제도와 비평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세대론을 비롯한 다양한 담론들을 경유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고 수행하고 있는 ‘비평’이라는 실재다. 마찬가지로, 윤아랑이 아무리 영화나 만화에 대해 논하기 위해 수많은 철학적 논의를 끌어오더라도, 끝내 그가 말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영화 그 자체’이고 ‘만화 그 자체’이다. 그는 다양한 비평과 철학적 논의들을 살펴보다가 끝내“(...)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그랬듯) ‘이것도 만화인가?’라고 물어보기보다는 ‘어떻게 만화가 되는가?’라고 물어봐야 한다. 이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춤’이라는, 만화에 대한 스콧 맥클라우드의 정의는 훨씬 더 급진화되어야 하리라. 우리에게 당장 주어진 만화들과 함께 살아갈 지금을 위한 만화비평의 유효성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5라고 제안한다. 요컨대, 그의 분투는 만화라는 매체의 조건과 그에 따른 만화라는 범주의 규정, 그리고 그러한 규정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만화적 속성(혹은 특질)에 대한 탐구이자‘만화 그 자체’에 대한 논의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듯, 말할 수 있는 것을 더 잘 말하기 위해 처절하게 애쓰고 있다는 점에서, 윤아랑의 비평은 철학적 비평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윤아랑과 그의 비평이 늘 모순적이라고 느낀다. 반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인,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애쓰는 비평은 모순적이다. 그렇지만 분명 지금 내 앞에는 윤아랑과 그의 책인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이 존재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순을 앞에 두니, 나의 배 속도 뭔가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반철학적이면서 철학적인2022-08-08review on criticNow here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역. 책세상.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