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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What Can Philosophy Really Do?

translation on concept in 2023 at 전기가오리

최근 스티븐 호킹은 “철학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와 공저한 자신의 책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의 첫 장에서 호킹은 이렇게 말한다.

“( ...) 사람들은 늘 많은 질문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주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무엇이 실재의 본성인가?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 전통적으로 이러한 물음들은 철학의 것이었으나, 철학은 죽었다. 철학은 과학의 현대적 발전을, 특히 물리학의 현대적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다. 지식을 향한 탐구에서 선구자가 된 사람은 과학자이다.” (『The Grand Design』 5쪽)

호킹의 이의제기는 철학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이다. 이는 철학자의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지원금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대학 내 입지를 위 해서만이 아니다. 호킹의 이의제기에 대해서는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비판적 사고를 함양하며, 사유하는 시민을 교육하는 데 철학을 가르치는 일이 유용하다고 호소하는 방식으로 답할 수 있다. 그러나 호킹의 물음이 제기하는 진짜 이의제기는 철학적 사고, 즉, 철학 연구가 공헌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 는 일은, 우리 철학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와 관련한 외적 이유를 찾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인 우리의 정당한 목표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 디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렇게 기여할 수 있게끔 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게 한다는 점에서 내적으로도 중요하다.

몇몇 철학자는 호킹의 논평에 분노를 표했다. 그러나 호킹은 그저 우리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문제—철학적 문제—를 명료히 했을 따름이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호 킹이 제기한 문제가 철학 내에서 어떻게 제기되어왔는지를 돌아보고자 하고, 과거에는 그 문제에 어떠한 답변이 제시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새 로운 답변을 옹호할 것이다: 철학은 규범적 분과 학문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철학은 사물이 어떠한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물이 어떠해야만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철학이라는 분과 학문의 역사를 고려하면, 철학의 적절한 역할을 결정하는 문제는 꽤 자연스럽게 또 피치못하게 등장했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데카르트를 거쳐 칸트까지 이르는 철학자들은 오늘날 철학과에서 논의되는 주제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생물학, 생리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의 주 제에도 기여했다. 17세기 무렵 물리학을 시작으로, 전문화된 과학의 분과들은 각각의 고유한 주제와 방법론을 획득하면서 점진적으로 다양화되고 분리되기 시작했다.

분과 학문의 종사자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은 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초미의 물음에 직면한다: 철학자가 할 일은 무엇이 남았는가? 그리고 철학자는 그 일을 어떻 게 해야만 하는가?

과학이 진보하고 성공하는 모습과 철학 이론 내에서 점점 분화가 강화되는 모습을 대조해보면 더 우려스럽다. 철학자가 할 무언가가 남아 있기는 할까? 어쩌면 철 학은 다양한 과학 분과에 편입되어야 하거나, ‘죽었기에’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철학의 작업과 과학의 작업을 구 별하려는 예전의 한 시도는, 과학은 외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을 연구하는 반면, 철학은 내적이고 정신적인 현 상을 연구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논리학과 인식론이 사 고의 법칙에 대한 탐구인 심리학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심리주의 psychologism 로 이어진다. 그러나 19세기 말경 심 리학이 스스로를 철학에서 분리했기 에 심리주의는 위기를 맞았다. 에드 문트 후설이 강조한 심리주의의 주된 문제점은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유 하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어떻게 추 론하고 있는지를 다룬 심리학 연구 는 우리가 어떻게 추론해야만 하는지 를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 나 후설이 주장했듯 논리학은 우리가 어떻게 추론해야만 하는지를 다루는 “실천적-규범적” 분과 학문이다. 그래 서 논리적 참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 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경험적 일반 화와 동일시될 수 없다.

철학의 적절한 역할에 관한 물음은 20세기 초 철학자도 사로잡은 관심사였다. 길버트 라일이 자신의 “자전적” 성찰에서 논하듯, “우리 철학자들은 거의 평생 동안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직함을 탐구했다.”

20세기 초 무렵에는, 철학의 역할에 관한 답변을 둘러싸고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라일, 비트겐슈타인, 후설, 카르납 같은 20세기 초 철학자들이 철학적 작업 과 과학적 작업의 관계에 대해 받아들인 견해는 비교적 유사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경험적 작업인 반면, 철학은 개념적 작업이다. 이렇게 분석하는 과정에서 언 어가 맡은 역할과 이 분석이 취해야 하는 형식을 두고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들 모두 철학의 역할이 사실적 지식이나 경험적 설명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 근본적 으로 개념적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들의 논의는 적어도 철학과 과학의 뚜렷한 노동 분업을 내놓는 것처럼 보였고, 그리하여 (제한적이지만) 철학에 고유의 역할을 제 공하는 듯했다. 즉, 20세기 초 철학자들은 비의미 nonsense와 의미를 구별하고, 이러한 구별을 통해 사이비 문제를 해소하거나 과학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을 검토하는, 혹은 일상언어의 개념들을 분석하는 일이라는 뚜렷한 역할을 철학에 부여했다.

철학이 정당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경험적 작업이라기보다 개념적 작업이라는 생각은 20세기 초 실증주의와 20세기 중반 일상언어 철학 때 정점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더 지속되지는 못했다.

왜 지속되지 못했을까? 첫째, 전통적으로 철학이 품었던 원대한 야심을 포기하면서 철학이 우리의 일상언어나 개념의 구조를 그리는 일 외에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 다고 생각하는 일은 많은 이를 실망시켰고, 지금도 실망시키고 있다. 테드 사이더가 자신의 최근 저서 『세계에 관한 책을 쓰기 Writing the Book of the World』에 썼듯, “어느 누가 실 재의 근본 특징을 탐구하는 일보다 우리의 편협한 개념적 도식을 탐구하는 일을 더 좋아하겠는가?”(『Writing the Book of the World』 xxiv쪽)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철학자들도 비슷한 의문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많은 윤리학자는 자신이 단지 옳음과 그름이라는 개념에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무엇이 정말로 옳고 그른지를 밝 혀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철학을 개념에 대한 작업으로 끌고가는 추세는 철학이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불가피한 반발을 유발했다.

둘째, 콰인은 분석적인 것—의미에 따른 참의 사안(혹은 개념적 참의 사안)—과 종합적인 것(경험적 탐구의 사안) 사이의 구별이 있다는 생각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콰인의 이러한 견해는 시기상조이기는 했지만 철학과 과학의 노동 분업을 거부하는 이유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많은 사람이 존재론, 즉 존재하는 것에 관한 연구의 철학 적 문제를 “자연과학의 문제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며 콰인을 따랐다.

콰인의 이 생각은 형이상학의 부 활로, 그리고 존재자에 관한 질문에 주어지는 다양한 답변으로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유기체만이 실제로 존재 하는 복합 대상 composite object 이라고 주 장했다(그 결과, 엘리 허쉬Eli Hirsch의 훌 륭한 비판이 말하듯, 우리는 사과가 존재하지 않아도 사과나무는 존재한 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다른 이 들은—인공물이나 유기체 같은 복합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특정한 기 본적이고 단순한 대상만이 존재한다 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 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대상으로 분할되지 않은, 그저 무구별적인 ‘무 언가stuff’의 존재만을 인정하면서) 그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 했다. 위와 같은 형이상학자들에 의 해 철학은 다시 유사-과학처럼 보이 게 되었다—즉, 철학자들은 안락의자 에서 실재의 구조와 구성 요소에 관 해 발언하고, 매우 다양한 이론들을 제시하면서도 그것들 중 하나를 선택 하게 하는 경험적 수단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한 이론을 다른 이론으로 교환할 뿐인 것 같은 경합하는 ‘이론적 덕’에 호소할 뿐이다.

대대적으로 수정되는 때가 잦고 경험적으로 구별 불가능한 형이상학 ‘이론’들의 증가는 형이상학의 역할과 한계를 둘러싼 새로운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더 넓게는,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형이상학의 방법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위기, 더 일반적으로 말 하면 철학의 방법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위기에 봉착한다. 철학적 방법론과 메타형이상학에 관한 최근의 논문, 컨퍼런스, 단행본의 과잉 상태가 명백하게 보여주듯, 철학 이 정당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문제는 동시대 철학자 모두에게 너무 익숙한 문제이다. 최근 들어 호킹이 이 문제를 공적인 논제로 끌어낸 것일 수는 있겠으나, 호킹이 이 문제를 처음으로 포착했다거나 문제에 대한 철학자들의 관심을 최초로 이끌어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철학의 적절한 역할에 대한 최근 논의들은 우리를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철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며 철학이 자연과학과 ‘동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엉터리 과학이나 무모한 사변처럼 보이는 공상적인 견해들이 무분별하게 확산될 것이고, 심지어 그 견해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반대 로, 철학과 과학 사이에는 노동 분업이 이루어지며 철학의 역할은 개념적 작업에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윤리학 같은 중요한 영역들을 위한 적절한 자리를 남겨두 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편협하고 제한된 철학관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호킹의 문제 제기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철학에서 과학으로 넘어왔다고 호킹이 정리한 물음은 ‘우주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실재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 은 어디에서 왔는가?’ 같은 것들이다. (일부 동료와 달리) 나는 과학의 진지한 경험적 작업 없이는 이러한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철학의 다른 핵심 물음은 호킹의 목록에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근본 인권으로 잡아야 하는가? 어떤 형태의 정부가 가장 정의로 운가? 참인 전제에서 출발한 후 참인 결론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추론해야 하는가? 예술작품의 가치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윤리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논리학, 미학 같은 핵심 영역에 종사하는 철학자들은 호킹의 발언이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짜증이 날 수 있지만 전혀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아 있는 이 물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모두 규범적 normative 물음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통치되어 야 하는지, 어떻게 추론해야 하는지, 예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들이다. (그리 놀랄 이유 없이) 이에 대조적으로, 호킹이 초점을 맞춘 물음들은 우주의 역사, 구조, 본성에 관한 (곧, 무엇이 존재하는지, 존재자는 어떠한 것이고 어떠한 법칙을 따르는지, 존재자는 어디에서 오는지에 관한) 사실적factual 물음이다.

이 구별은 심리주의에 대한 기존의 비판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추론하는지에 관한 기술적descriptive 물음과 우리가 어떻게 추론해야 하는지 에 관한 규범적 물음을 구별해야만 한 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내놓은 비판 말 이다. 전자의 물음은 심리학에서(혹은 궁극적으로는 아마도 신경과학에서) 가장 잘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인 반면, 어떻게 추론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 은 논리학의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일반 적인 제안으로 바뀔 수 있다. 철학은 정말로는 규범적 분과 학문이다. ‘-이 다is’와 ‘-이어야 한다ought’의 익숙한 구 별을 고려할 때, 여기에는 확실한 이 점이 있다: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방법 은 무엇이 사실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과학적 이고 경험적인 방법은 무엇이 사실이 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 해주지 않는다.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방법은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 고, 추론하며, 행위해야 하는지에 관 하여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 구별을 문제에 대입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오래된 [과학의 과업과 철학의 과업 사이의 구별이라는] 개념 분석에 대한 몇몇 반대가 누그러든다. 왜냐하면 이 모델에서 철학은 규범 일반과 연관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모델에서 철 학은 개념을 통한 추론을 지배하는 규범을 포함하되 그 이상의 여지를 남겨둔다.

이 견해는 윤리학과 정치철학, 논리학과 미학 내 많은 작업과 잘 들어맞지만, 철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과학철학, 인식론, 형이상학 같은 것들을 밖으로 밀 어내어 보호받지 못하도록 하는 벽을 쌓는 것이 아닌지를 걱정하는 이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과학철학과 인식론의 상당 부분을 규범적 관점에서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인식론은 우리가 증거들을 어떻게 획득해야 하고 또 결론을 어떻게 도출해야 하 는지, 어떤 사람이 지식을 가진다고 간주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불확실한 조건하에서 어떻게 추론해야만 하는지 같은 명백히 규범적인 질문들을 탐구한다.

과학철학자는 우리가 증거에 근거하여 어떻게 추론해야 하는지, 과학적 추론에서 어떤 방법론을 활용하고 유념해야 하는지, 양자역학의 경험적 결과로부터 세계에 관한 어떤 결론이 도출되어야 하는지, 인지과학과 심리학의 결과로부터 마음에 관한 어떤 결론이 도출되어야 하는지 같은 문제들을 탐구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과학철 학과 과학이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다—또 구별되어서도 안 된다. 과학자 또한 증거로부터 우리가 우리가 세계에 관해 도출해야 하는 결론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둔다. 더 나아가, 과학철학자와 과학자 모두 생물학, 생태학, 양자역학에서 우리가 채택해야 하는 개념적 도식이 무엇인지에 관한 규범적 쟁점을 고려할 것이다. 그러한 선택들은 경험적 정보에 입각해야 하고, 과학자의 필요와 관행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한에서, 그 선택들은 과학에 대한 깊은 지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 는 대안적인 개념적 도식을 고려하는 일과 개념적 도식을 더 큰 그림에 통합하는 일을 포함하는, 더욱 넓은 개념적 작업의 일종이겠다. 그러한 도움을 주는 데에는 철학 자가 딱이라고 우리가 소망하는 작업 말이다. 어쨌든, 우리의 목표는 과학과 철학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고 또 갈라놓는 것이어서도 안 되며, 오히려 과학자의 손으로든 철학자의 손으로든 아니면 철학자와 과학자가 함께하든, 철학적 작업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데 옛 형이상학은 어떠한가? 형이상학은 도살되도록 내버려두면서, 철학의 나머지 영역이라도 되찾고 구제하면 되는가? (형이상학은 늘 가장 먼저 의심받았고, 가장 마지막으로 구제되었다.) 나는 이러한 방식이 정말로 형이상학을 희생양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과거 작업 상당수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작 업들이 (부정할 수 없는 정당성을 가지고) 앞으로 어떠할 수 있는지를 건강하게 다시 생각하는 방법을 내놓는다고 생각한다.

우선 먼저 일상언어 철학과 전통적 개념 분석을 생각해보자. 자유 개념을 분석하는 사람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유 개념의 윤곽을 고려할 때) 우리가 자유에 관하 여 결론내려야만 하는 것—자유 개념이 결정론을 배제하는지, 책임을 필함하는지 등—을 결정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인격 동일성personal identity을 탐구하는 사람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인격’ 개념의 윤곽을 고 려할 때, 혹은 ‘인격’ 개념에 우리가 원 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이 존재하 거나 소멸할 때에 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지에 관해 관심을 기울인 다. 물질적 형성 material constitution 에 관한 문제 같은 많은 형이상학적 퍼즐은 우 리가 분명한 모순에 빠질 때 제거하거 나 재해석해야 하는 여러 전제에 대한 퍼즐로 가장 잘 이해된다. (우리는 조 각상이 있다고도, 그리고 진흙 덩어리 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 조각상이 그 진흙과 동일하지는 않다 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진흙은 뭉개 져도 여전히 진흙으로 존재하는 반면 조각상은 뭉개지면 조각상으로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하나의 대상만이 거기 있다고 생각 하기도 한다. 이처럼 명백히 비일관된 믿음들의 집합을 마주할 때 우리는 무 엇을 해야만 하는가?) 걱정의 첫 번째 단계에서 많은 사람이 철학의 정당한 역할로 간주하는 개념 분석이라는 작업은 개념의 윤곽을 고려할 때 다양한 주제에 관해 우리가 어떠한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후설이 말했듯, 철학의 정당한 역할은 단지 추론 논리의 형식적 규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구조를 고려할 때) 질료적 추론material inference의 규칙을 다루는 데 있다.

그런데 철학의 정당한 역할을 이렇게 간주하면, 형이상학은 현존하는 개념을 기반으로 우리가 어떻게 추론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에 불과한 편협한 게임이 되어버리 지 않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카르납은 개념 분석에서 철학이 맡은 유용한 역할만이 아니라 카르납 자신이 “개념 공학 conceptual engineering”이라고 불렀던 것—개념들의 체계 중 어떤 것이 과학에 가장 유용하거나 유용할지를 규명하는 작업—에서 철학이 맡은 역할도 인정했다. 규범적 용어로 말하자면, 그러한 작업은 주어진 목적을 위해 그리고 주어 진 맥락에서 우리가 채택해야만 하는 개념이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이다.

‘개념 공학’이라는 프로젝트는 과학의 목적보다 더 많은 목적들을 고려할 때, 그리고 논리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보다 더 많은 개념을 고려할 때, 더 포괄적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심지어 기존의 형이상학에서도 단순히 ‘자유란 무엇인가?’나 ‘개인이란 무엇인가?’를 묻고서, 전통적인 분석이나 실험 철학을 통해 굳이 기존의 개념으로부터 그 물음에 관하여 무엇이 따라나오는지 밝히려고 할 필요가 없다(물론 그것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기존의 개념이 우리에게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 지를—왜 우리가 그러한 개념을 원하는지, 또 우리가 칭찬과 비난, 법적 및 도덕적 책임, 권리와 의무를 귀속시킬 때 그러한 개념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한발 물 러서서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개념 공학의 본성을 분명하게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착각했던 몇몇 형이상학적 실재를 우리가 발견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념 공학을 더 잘 할 수 있다.

개념상의 바닥이 나올 때까지 계속 편협하게 파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더 흥미로운 개념 공학 프로젝트도 생겨나는 중이다. 이를테면, 샐리 해스랭어는 자신의 책 『실재에 저항하기Resisting Reality』에서 우리가 인종과 젠더에 관한 철학을 할 때 행해야 하는 것은 인종이나 젠더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고, 즉 현존하는 개념들이 어 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나 우리가 그 개념들에 근거하여 결론지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 대신, 인종과 젠더라는 개 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해스랭어의 주장이다. 요컨대 우리는 사회 정의를 달성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범주들이 무엇인지를 물 어야 한다(『Resisting Reality』 365쪽).

이러한 견해에서 보자면, 우리는 형이상학이 개념적 작업에 종사한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어느 정도 유지하되 이 생각을 확장하기도 한다. 이 모델에서 철학은 그저 개념적 분석에만 종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철학은 모든 종류의 규범적인 개념적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철학은 현존하는 개념으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하거나 문제적인 개념을 (우리의 목적을 고려할 때) 어떻게 수정해야만 하는지, 과학적인 목적부터 윤리적인 목적까지 이르는 다양한 목적을 고려할 때 어떤 개념이 유지되거나 채택되거나 버려지거나 고안되어야 할지를 규명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이 제안—철학이 규범적 분과 학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제안—자체도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글의 목표는 철학이 해왔거나 해왔 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기술하는 데 있지 않다. 철학에게 분명하고 쓸모 있는 역할을 주는, 철학의 자기-이해 self-conception를 제안하고, 이의제기에 답하며, 철학이 지금껏 해왔고 또 할 수 있는 유용하고 흥미롭고 재미있는 많은 점을 포착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형이상학을, 더 일반적으로 철학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것은 회의론자와 비관론자에 맞서 철학을 옹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우리 철학자들이 자 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경합하는 견해들을 평가할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변화 를 가져올 수 있다. 그 의미는 경합하는 견해들의 확산을 우리가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덜 당황스럽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경합하는 견해들을 우리가 무엇 을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암묵적인 답변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갖는 여러 답변 사이의 차이가 충분히 이유 있다고 예상할 법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규범이 얽혀 있을 때—말하자면, 현존하는 기존 개념 구조를 고려할 때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관여하는 규범과, 우리의 개 념 구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규명하는 데 관여하는 규범이 얽혀 있을 때—우리는 오랜 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진보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제안에는 많은 이점이 있다. 첫째, 이 견해에서 보자면 철학은 과학의 라이벌이 아니며 철학은 명확한 역할을 맡는다. 물론, 이는 철학과 과학의 역할이 완전히 다 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도 증거를 고려할 때 우리가 어떻게 추론해야 하는지, 생물학에서 이런저런 목적을 위해 채택해야만 하는 종 개념은 무엇인지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경험적 자료가 적절하고 또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 물음 역시 규범적 작업을 도입하지 않고서 순전히 경험적으로만 결정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멍청한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철학적 작업을 잉여적인 것 내지 유사-과학으로 만드는 위험 없이도 과학과 철학을 중첩하여 유익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이 제안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형이상학을 실재의 근본 구조를 발견하는 것으로, 혹은 무엇이 존재하는지나 무엇이 토대인지를 규명하 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고 규범적 용어나 개념주의적 용어로 이러한 작업들을 재해석하는 데 저항하는 사람은) 이 제안을 좋아하지 않을 듯하다. 그것은 그들 의 권리이지만 나로서는 그들이 호킹의 이의제기에 혼자 맞서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

나는 호킹의 이의제기에 이렇게 규범적인 방식으로 답하는 것이, 단지 철학자의 자기 존중감을 지킬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우리 철학자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 떻게 그것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더 분명한 그림을 제시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규범적 방식은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매우 풍부한 그림도 제시한다. 지은이: 에이미 토마손Amie Thomasson은 마이애미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며, 『허구와 형이상학Fiction and Metaphysics』(1999), 『일상적 대상들Ordinary Objects』(2007), 『쉬운 존재론Ontology made Easy』(2015)의 저자이다. 이 글의 초고에 유용한 논평을 해준 앨러스테어 윌슨Alastair Wilson, 론 모랄레스Ron Morales, 마크 워런Mark Warren, 하비에르 쿰파Javier Cumpa에게 감사를 표한다. 옮긴이: 분석미학과 음악미학을 공부한다. 음악웹진 [weiv]에서 동시대 대중음악에 관하여 가끔 글을 쓴다. 지각 경험의 내용에 대한 철학적 논쟁에서 이중 과정 이론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논문(「지각 경험의 내용은 개념적인가 아니면 비개념적인가?—양립 모델로서의 이중 과정 이론에 대한 옹호」)을 썼고, 분석적 언어와 방법을 토대로 한 대중음악 비평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일러두기: 이 글은 Amie Thomasson, “What Can Philosophy Really Do?”, The Philosophers’ Magazine, Issue 71, 4th Quarter 2015, 17–23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Copyright Clearance Center를 통한 저작권자와의 계약으로 도서출판 전기가오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발행일

2023년 3월 31일 지은이

에이미 토마손 옮긴이

전대한 펴낸곳

전기가오리 편집

신우승 디자인

신덕호 인쇄

인타임 출판등록

제2016-000185호 (2016년 6월 27일)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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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com/philoelectroray 인스타그램 instagram.com/philoelectroray What Can Philosophy Really Do? by Amie Thomasson Copyright © The Philosophers’ Magazine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3 by Philo-electro-ray 철학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에이미 토마손

철학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2023-03-31translation on conceptNow here